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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캠핑의 역사
우리나라에 캠프를 소개하고 발전시켜 온 주인공도 역시 YMCA였다. 황성 기독교 청년회(현 서울 YMCA)는 1910년 6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근교의 진관사에서 제1회 학생 하령회를 개최하였다. 하령회란 시카고 YMCA의 지도자였던 무디의 주도하에 일어났던 여름 컨퍼런스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서 제1회 학생 하령회는 전국 각징서 모여든 46명의 학생들이 참석하였고 6개의 교파와 4개국 대표 16명이 연사로 초빙되었다. 이것은 한ㄴ국 역사상 최초의 초교파/전국적인 학생 집회였으며 불교사원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집회는 강습회 성격의 컨퍼런스였으며 학생 중심의 집회로서 그후 매년 송도(개성의 옛 이름), 우이동, 북한산성 등 주로 야외에서 거행되었다.
지금까지 이 집회를 야외교육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학생 하령회는 부흥회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강의와 성경공부 시간으로 짜여졌다는 점에서 캠핑이라기 보다는 강습회 또는 임원 수련회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캠핑역사는 YMCA와 보이스카우트가 서로 만남으로써 잉태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즉 1922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의 소년부 간사였던 정성채는 17명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YMCA내에 소년 척후단을 창립하고 보이 스카우트 운동의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에 관해 동아일보(1922년 10월 7일자)는 "청소년들에게는 군복을 입히고 사내다운 기상을 기르는 동시에 희생정신과 고상한 인격 양성에 목적이 있었던 만큼 한국과 같이 나라없이 군인이 될 기회가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급속히 진전되었다"고 썼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보이스카우트 활동으로 '조선 소년군'이 있었다. 즉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보 교사였던 조철호는 중앙고보 뒤뜰에서 '조선 소년군' 창립과 함께 경성 제1호대의 발대식을 거행하였다. 홍백의 단기와 대기를 앞세우고 8명의 소년으로 조직된 조선소년군은 소년들에게 항일정신을 깨우치게 하였고 갖가지 스카우트 활동을 해나가는 동안 조국 광복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렇게 조철호희 조선소년군과 정성채의 조선척후단이 연합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1924년 3월 1일 서울 YMCA회관에서 서울과 인천에 있는 단체의 관계자가 모여 조선척후단 조선총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에 보이 스카우트 세계 기준 헌장을 통과시켰으며 초대 총재로 YMCA의 이상재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부총재에는 유성준, 신흥우, 정성채 등 YMCA 지도자들이 당선됨으로써 보이스카우트는 YMCA의 직저 사업의 하나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초대 총재였던 이상재는 1906년 YMCA내에 유도부를 신설하는 자리에서 "여기에서 장사 백명만 양성하라"는 발언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소년척후단 총재직을 이러한 기대에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1927년 그가 별세하자 사상 처음의 사회장이 있었는데 그때 소년 척후 단원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정복차람으로 단기를 들고 가두와 역두에서 그의 영구를 호송하는 광경은 나라없고 군대없던 우리 민족으로서 감격화 흥분을 자아내는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929년 7월호 YMCA 기관지인 <청년>의 권두언에는 국제소년야영대회에 대한 희망이란 글이 적혀있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대회에 조선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1929년 8월호 청년지에는 국제 소년 야영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였던 정성채가 제출한 보고서가 실려있다. 이 대회는 13개국에서 110명이 참석한 대규모의 국제대회였으며 우리나라는 11명이 참가하였다.
캠핑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도 1935년부터 청년지 여름호에 캠핑에 관ㄴ한 특집기사를 매년 빠짐없이 다루고 있을 만큼 활발하였으며, YMCA 소년부 주최로 매주 토요일마다 보이스카우트 정신 훈련을 실시해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당시에 이미 주말캠프, 고정 캠프 하이킹, 소년캠프, High-YMCA 캠프, 지도자 훈련 캠프, 국제 소년 캠프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천막을 이용하여 주로 인천의 송도, 아차산 부근의 광장동, 남한산성, 북한산, 도봉산 등 서울 외곽 지역에서 진행되어졌다.
그후 조선 척후대는 1937년 7월 31일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되었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사단법인 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하면서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